아픔이 길이 되려면
지난 주에 읽은 책 저자의 소개로 일단 책을 빌렸습니다.
책 제목만 메모를 해 놓고는 '시 제목인가?' 기억을 잠시 더듬다 아닌걸 알았습니다.
다행히 수녀원 도서관 소장 도서라 오늘 아침 대출을 하고 프롤로그와 목차만 읽었는데 ...
야단났습니다. 올 가을은 유난히 책들이 줄지어 저를 방문합니다.
예기치 않았던 뜻밖의 책들의 방문에 사실은 많이 설레고
그간 잘 가지 않았던 낯선 길로 저를 안내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오는 주일 10/15. 연중 28주일 복음이 '혼인잔치 초대' (마태 22,1-14) 의 복음입니다.
올 가을 제가 받고 있는 '낯선 길 안으로의 초대' 에 합당한 예복을 받아 입습니다.
그 예복은 '아픔을 느끼는 마음, 타인의 아픔에 함께 공감하는 아픔'
주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누군가에게는 길이 되어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해 새로운 길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저자 김승섭의 '들어가며'에 적힌 글을 먼저 공유합니다.
이 글만으로도 이 한 권의 책이 어떠할지 가히 짐작이 되어서 저자의 다른 책도 함께 찾아보았습니다.
이렇게 늘 책읽기는 이어집니다.
"저는 사회역학 Social Epidemiology 을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흡연과 벤젠 노출처럼, 차별과 사회적 고립과 고용불안이 인간의 몸을 해칠 수 있다는 연구가설을 탐구합니다.
(중략) 의료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더라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있습니다.
실업과 재취업 정책에 돈을 투자하지 않는 나라에서는 해고로 고통받다 자살하는 노동자가 계속 늘어날 것이고,
경제위기 때 복지 예산을 축소하는 사회에서는 치료가 어렵지 않은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더 많이 생겨날 것입니다.
한국의 건설 노동자를 아프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암 발생을 초래할 수 있는 유전적 요인보다는
고용불안 속에서 안전장치 없이 하루하루 일해야 하는 위험한 작업환경일 테니까요.
허리가 아파도 병가를 쓸 수 없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에게 바로 옆 건물 병원의 의료기술은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는지요. (중략)
관점의 문제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몸과 건강을 어떻게 바라보고,
개개인의 삶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은 어디까지라고 생각하는지에 관한 고민이지요.
질병의 사회적 원인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분포되어 있지 않습니다.
더 약한 사람들이 더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그래서 더 자주 아픕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소득이 없는 노인이,
차별에 노출된 결혼이주여성과 성소수자가 더 일찍 죽습니다.
지난 몇 년간 사회적 상처가 어떻게 인간의 몸을 병들게 하는지에 대한 논문을 읽고,
소방공무원, 세월호 생존 학생, 성소수자,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를 만나고 그들의 건강에 관해 연구하며,
여러 글을 썼습니다. 이 사회가 제게 던진 질문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온전한 답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 부족함까지도 나누며 함께 답을 찾아가면 좋겠다고 여겼습니다. (중략)
세상에 내놓는 제 첫 책입니다. 누구보다도 어머니 박숙희님께 감사를 전합니다.
돌이켜보면 인간이 함께 건강하게 살기위해 지켜야 할 원칙들은 결국 당신이 보여준 삶의 자세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넉넉지 않은 집에서 의대를 졸업한 큰아들이 걸어가는 길을 묵묵히 지켜봐주셨던 그 마음이 제게는 가장 큰 응원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윤리 선생님이셨던 이금준 선생님과 외삼촌 박인철 교수님과 친구 박종필 선생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어떻게 해야 당신들처럼 생각하며 타인을 대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이 제게는 벗어날 수 없는 숙제였습니다.
제가 쓰는 모든 글의 첫 독자인 아내 영선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며 제가 할 수 있는 말과 해서는 안 되는 말을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글을 쓸 때 가능하다면, 사회적 상처에 대해 말하는 제 글이
그녀와 같이 따뜻하고 선한 사람들이 읽기에 힘들지 않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세 딸, 지인, 해인, 라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지금은 아빠의 글에 관심이 없지만 언젠가 한 번은 이 책을 읽어줄 것이라고,
그리고 그때는 함께 놀다가도 다급한 눈빛으로 집을 나서던 아빠를 조금은 이해해주리라 믿습니다."
2017년 9월. 안암 연구실에서 김승섭
여기까지 읽고 어머니 생각이 나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저자가 언급한 고마운 사람들을 따라 읽어가며 제게 고마운 사람들의 얼굴이 함께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서문을 읽고 또 이렇게 잠겨보기도 참 오랜만입니다. 가을 가을합니다 ~~
Sr. 이 글라라
2023-10-12